- 이베트 탄
- BBC News, 싱가포르
2022년 4월 28일
수년간의 숙고 끝에 지난달 싱가포르 정부는 미혼 여성의 별다른 의학적 사유 없는 난자 냉동을 2023년부터 합법화하겠다고 발표했다.
정부의 결정을 환영하는 이들도 많지만, 조건적인 합법화이기에 진정 포용적인 정책으로 인정받기 전까지는 아직 싱가포르 사회가 갈 길이 멀다는 목소리도 있다.
싱가포르의 미혼 직장여성 그웬돌린 탄은 31세 때 난자를 얼려 보관하기로 결정했다.
탄은 언제나 아이를 갖고 싶었지만, 파트너가 없었다.
그런 탄에게 난자 냉동 시술은 최선의 해결책이었다. 아이를 갖기 위해 배우자를 선택하는 성급한 결정을 내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탄은 혼자 비행기를 타고 태국의 수도 방콕까지 수천 마일을 날아가 난자 냉동 보관 시술을 받았다. 물론 비용은 만만치 않아서 15000싱가포르달러(약 1370만원) 정도가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탄을 포함해 난자 냉동을 원하는 많은 싱가포르 여성들에게 외국행은 유일한 선택지였다.
싱가포르에서 난자 냉동은 극히 일부 경우를 제외하면 불법이기 때문이다.
2020년 싱가포르 사회가족개발부(MSF)는 난자 냉동 합법화를 위해 "다른 여러 요인 중에서도 윤리적, 사회적 우려"를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다 지난달, 싱가포르 정부는 2023년부터 21~35세 사이 미혼 여성의 난자 냉동을 허용하겠다고 발표했다. 획기적인 변화였다.
하지만 조건이 있었다. 합법적인 혼인을 한 여성만이 이전에 냉동한 난자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를 원하는 미혼 여성이나, 동성 연인은 제외됐다. 싱가포르에서 동성혼은 불법이다.
가임력 보존
전 세계적으로 난자 냉동 건수는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난자 냉동 보관 시술이란 여성의 난소에서 채취한 난자를 얼려 저장한 후 필요시 해동하는 과정이다.
정자와 함께 냉동하는 경우도 있다. 필요시 정자와 난자를 수정시켜 배아를 형성해 임신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기 때문이다.
미국 보조생식술학회(SART)의 자료에 따르면 2009년 미국에서 난자를 동결한 여성은 475명에 불과했다. 그러다 2018년에는 2500% 이상 증가해 13275명으로 늘어났다.
싱가포르에서도 난자 냉동을 찾는 여성들이 늘어났다.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의 한 클리닉은 AF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2021년 "점점 더 많은 싱가포르 여성들이 난자 냉동을 위해 찾아온다"라고 밝혔다.
이렇든 더 많은 싱가포르 여성들이 난자 냉동을 선택하면서 법을 개정해달라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작년 싱가포르에서 난자 냉동 합법화 촉구 캠페인인 '마이 에그 마이 타임(내 난자의 시간은 내가 결정한다)'을 전개한 엠마 또한 그중 한 명이다.
엠마는 "긍정적인 반응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수많은 여성이 난자를 얼리고 싶은 이유를 담은 메시지를 보내왔다"라고 밝혔다.
한편 청리휘 싱가포르 국회의원 또한 의회에서 합법화를 지속해서 외쳐온 인물이다.
청 의원은 "2016년 제가 처음 이 주제를 꺼내 들었을 때 사람들은 '그게 뭐냐, 너무 시대를 앞서갔다'라고 말했다"라고 회상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점점 더 많은 대화가 오갔습니다. (이 주제를 꺼낸 후) 작년엔 정말 반응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고맙다는 메시지를 훨씬 더 많이 받았어요."
싱가포르는 전 세계에서 출산율이 가장 낮은 국가 중 하나다. 이에 따라 난자 냉동 합법화를 통해 출산율을 높일 수 있을 거라고 환영하는 목소리도 있다. 실제로 지난 2020년 전 세계 평균 출산율은 여성 1명당 2.4명이었던 반면, 싱가포르는 1.1명으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싱가포르의 여성 인권 단체인 '어웨어'의 샤일리 힝고라니 대표는 합법화에 대해 "시의적절하다"라면서도 "실망스러운" 조건도 몇 가지 있다고 덧붙였다.
전통적인 가족 개념
세계에서 가장 현대적인 도심을 자랑하는 싱가포르이지만, 가족 개념에 있어서는 매우 보수적이다. 싱가포르에서 가족은 "사회의 기본 구성 요소"이다.
싱가포르 정부는 "'아버지, 어머니, 자녀'로 구성된 전통적이며 제한된 가족 정의를 추구"한다는 게 힝고라니의 설명이다.
실제로 싱가포르의 국가 정책은 전통적인 가족 구성 중심이다. 예를 들어 한부모가정이 누릴 수 있는 주택보조금은 제한적이다.
힝고라니는 "싱가포르의 주택 정책은 미혼모와 그 자녀들을 올바른 '가족 구성'으로 생각하지 않기에 이들에게는 제한된 보조금 혜택만을 제공한다"라고 말했다.
싱가포르에서 합법적으로 결혼할 수 없는 성소수자 연인을 포함한 미혼 남녀는 35세 전까지 공공 주택을 구매할 수 없으며, 35세가 넘는다고 해도 주어진 선택의 폭이 좁다.
한편 이번 합법화의 조건을 수정할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사회가족개발부 대변인은 싱가포르의 공공 정책은 "결혼제도 내 부모의 지위를 장려한다"라는 대답을 내놨다.
이에 대해 힝고라니는 "실망스럽지만 놀랍지 않다"라며 정부가 "결혼 여부, 경제적 능력, 학력 등에 상관없는 난자 냉동 합법화를 추진해야 한다"라고 촉구했다.
이번 합법화 정책의 또 다른 문제는 35세 이하 여성의 난자 냉동만 허용한다는 점이다.
이는 영국의 인간생식배아관리국(HFEA)가 정한 가이드라인에 따른 것으로, 나이가 들수록 임신 가능성을 좌우하는 난자의 질이 떨어지기에, 35세 이전을 난자 냉동의 최적기로 본다.
그러나 조사에 따르면 영국에서는 38세 여성들이 난자 냉동 시술을 가장 많이 찾았으며, 40대 여성 또한 그 숫자가 적지 않았다.
청 의원은 싱가포르 여성들 또한 비슷한 선택을 하게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싱가포르는 선진국입니다. 싱가포르 여성들은 직업 커리어가 있고 선택할 수 있습니다. 35세 나이 제한은 너무 빠듯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난자의 질이 나쁘지 않지만 37세라는 이유만으로 여성의 난자 냉동을 막아야 하는 걸까요?"
그러나 사회가족개발부는 이러한 나이 제한에 대해 "35세 이후에는 난자의 질이 현저히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국제적으로 공인된 과학적 증거 및 전문가들의 의견에 근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경우에 따라 이의 제기가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사회가족개발부는 "나이 제한을 재검토할 수도 있다"라면서 가능성을 내비쳤다. 그러나 "35세 이상 여성에게서 채취한 난자의 임신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의학적 진보가 이뤄진다면"이라는 조건을 달았다.
그러나 탄과 같은 여성들은 비록 제한적인 합법화이긴 하지만, 이번 조치가 더 많은 싱가포르 여성들이 난자를 냉동할 수 있는 "힘을 실어줄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들의 주체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성의 몸이고 여성의 난자입니다. 제가 40살에 미혼인 상태로 아이를 갖고 싶다고 해도 이것 또한 제 선택입니다. 하지만 전 궁극적으로 이번 합법화 조치 또한 분명 중요한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가 더 나아갈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중대 변화를 축하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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